눈으로 봐도 보이는 것이 없으니 분별이 없고
귀로 들어도 소리가 없으니 시비가 끊어진다.
분별과 시비는 모두 다 내려놓아 버리고
다만 마음의 부처를 보고 스스로 귀의하라.
目無所見無分別(목무소견무분별)
耳聽無聲絶是非(이청무성절시비)
分別是非都放下(분별시비도방하)
但看心佛自歸依(단간심불자귀의)
-부설 거사(浮雪居士, 신라인)
부설 거사는 대뜸, “눈으로 봐도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한다. 더 나아가, “귀로 들어도 (들리는) 소리가 없다”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눈에 보이는 데도 보이는 것이 없다하고, 귀로 듣는데도 소리가 없다하니, 시각장애인도 아니고, 청각장애인도 아닌데, 설마 지금 부설 거사가 ‘구라’치고 있는 것은 아닐 테고. 필자가 잠시 속아 넘어간 것은 이 글이 선시라는 것이었다.
‘선의 눈’[선안(禪眼]으로 보기 때문에 보여도 “보이는 것”이 없고. “들어도” 들리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분별이 끊어지고, 시비가 사라질 밖에.
근데, 가만 보면, 선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글자가 ‘無’(무)와 ‘不’(불, 부)자와 ‘非’(비)다. 이 선시 역시 마찬가지다. 겨우 넉 줄(7언 절구) 밖에 안 되는 시에 ‘無’자가 무려 3번이나 들어간다.
왜 그럴까. 선이 문자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로 현상 너머의 현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 ‘‘無’와 ‘不’과 ‘非’의 세계’[진공(眞空)]를 넘어가면 다시 ‘묘하게 존재하고 있는 존재’[묘유(妙有]를 보기 때문이다. 선시를 이해할 때 선가의 언어가 지극히 압축되어 있는데다 매우 비약적이고 은유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그 맛을 몇 천배로 즐길 수 있다.
또 하나.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사상(불교 포함)의 특징은 서구처럼 조직적이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설명보다는 암시적이고 상징적이고 매우 난해한 은유적 비유를 통해 ‘깨달음’[오도(悟道)]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진리의 참뜻은 오히려 언어를 떠나 있다. 실제 법이라든가, 진여(眞如), 실재(實在), 묘유(妙有)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의 전달만 가능할 뿐, 언어로써는 그 전달과정과 본질을 드러낼 수 없는 까닭이다.
앞서 말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비롯한 심행처멸(心行處滅)이 그래서 나왔다. 즉, 선시에서 ‘無’와 ‘不’자와 ‘非’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말과 말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과 상상력으로도 그 묘유와 오도의 위치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자. 부설 거사는 승려에서 속인으로 환속하기까지, 그리고 환속해서 거사로 살며 묘화낭자와의 사이에 등운(아들)과 월명(딸)을 낳기까지, 그러나 거사로 살면서도 끝까지 부처님께 귀의해 불제자로 살며 한 소식을 얻을 때까지 온갖 시비와 분별을 뛰어넘어 참다운 귀의로 참다운 불제자의 삶을 산 것이다. 그리고 그 비결은 죽는 순간 임종게[臨終偈, 열반송(涅槃頌)]로 남긴 것이다. 그 비결은 아주 단순하게도 눈 닫고 귀 닫고 사는 것이다. 안근(眼根)과 이근(耳根)을 닫고 사니, 비근(鼻根)과 설근(舌根)과 신근(身根)과 의근(意根)이 작동할 원인이 없고, 원인이 없으니 결과 또한 절로 ‘無’가 되고 ‘不’이 되고 ‘非’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설 거사의 생몰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삼국시대 신라인(선덕여왕 때 인물)으로만 알려져 있다. 인도의 유마 거사, 중국의 방 거사와 함께 대표적인 거사로 통한다. 임종 직전 함께 도를 찾아 떠나가다 묘화낭자 때문에 헤어진 영조, 영희 두 출가도반 스님에게 염화미소처럼 한 말, “이 몸은 병(甁)이고 마음은 물이다”, 부설 거사는 그렇게 다시 찾아온 두 도반 스님에게 몸은 생겼다가 언젠가는 소멸하지만 마음은 본래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는 불생불명(不生不滅)의 진리를 보여주고 조용히 멸해간 셈이다.
출처:법보신문 2023년 03월 27일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