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지인들과 전남 강진 일대를 돌아봤다. 강진은 오래전 스치듯 지나친 적은 있지만, 다산초당과 백련사, 백운동 정원 등 이름난 곳을 두루 둘러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강진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수원 화성 축조 때 거중기를 고안한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귀양살이 고초를 겪으며 수많은 저서를 남긴 고장이다. 강진이 품고 있는 유서 깊은 장소인 다산초당과 이웃 백련사 탐방은 오랜 바람이었던 터라 개인적으로는 의미가 큰 여정이었다.
강진만을 굽어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주변의 동암, 서암, 천일각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초당은 다산이 공부하며 방대한 분량의 서책을 집필한 곳이다. 건물들을 오가며 들여다보고 둘러보니 200여 년 전 백성의 현실에 아파하며 해법을 찾던 선생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했다. 낙엽과 동백나무로 가득한 자연은 그대로인데 옛 현인은 기록과 이야기로만 존재하니 세월의 무상함이 쓸쓸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다산은 고향 경기도 광주(현 남양주)에서 천리 길인 강진에서 유배로 18년을 보냈는데 다산초당에서 10여 년간 머무르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이르는 책을 썼다.
‘다산초당(茶山艸堂)’이라는 현판 글씨체가 낯이 익다 싶더니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라고 한다. 안경을 쓴 초상화에서 그가 그리 멀지 않은 시대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주변을 호위하듯 자리한 동암은 다산이 거처하던 건물이고, 서암은 제자들의 유숙처였다. 멀지 않은 곳에 정자 천일각도 자리 잡고 있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다산이 자주 들러 시름을 달래던 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다산의 저술과 관련 기록은 수없이 많다. 그중 가장 널리 이야기되는 저서는 『목민심서(牧民心書)』다. 목민관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를 다룬 책이다. 모두 12편 가운데 애민편은 노인 봉양, 어린이 보호, 사회적 약자 배려, 질병 구호, 재난 구제에 관한 글로 구성됐다. 부모가 없는 아이를 기르는 사람은 세금을 면제해줘야 하고 장애인이나 불치병을 앓는 사람은 관이 나서서 도와야 한다고 했다.
다산은 혼자 사는 노인들이 함께 지내며 서로 의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도 했다. 노년의 외로움 극복은 시대를 뛰어넘는 과제인 모양이다. 다산의 혜안을 보여준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사회·경제적으로 약자에 속하는 이들에게 초점을 맞춘 다산의 애민 정신을 높이 꼽는다.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깊이 새겨야 할 정신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인재 채용과 관리에 관한 내용을 담은 이전(吏典)편도 교훈을 준다. 다산은 아전의 횡포를 심각한 문제로 지적한다. 재주가 많은 사람보다는 신실한 사람을 발탁하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어느 시대든 유효한 지적이다. 인본주의와 실사구시의 정신을 담은 다산의 방대한 저작은 극한 고난 속이어서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핍이 창조의 근원이 된 셈이다.
다산초당 인근의 백련사는 고려 말 불교 혁신운동인 백련결사가 일어났던 사찰이다. 다산이 혜장선사와 교우하며 유배지의 외로움을 달랬던 곳이다. 만덕산 아래로 차밭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어 나들이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차를 즐긴 다산은 직접 재배하기도 했고, 다도를 정립한 선사인 해남 대흥사의 초의와도 교류했다고 한다.
차를 매개로 다산, 혜장, 초의 사이에 맺어진 두터운 교분과 정신적 소통의 힘을 짐작해 본다. 좌절의 시간을 위대한 결실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또 다른 원동력일 것이다.
출처:국방일보 2023년 11월 07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