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DSM이라는 거대 텍스트가 정신의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잡게 된 맥락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DSM-5의 시대, 정신질환 진단명은 점점 더 불어나고 정신약물 또한 쏟아져나오는 지금, 과연 우리의 정신건강은 어떤 일들을 겪고 있을까?
DSM-6, DSM-7의 시대가 만약 온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진단명 하나씩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불어나는 진단편람은 인간의 다양한 특징들을 질환이라는 거대한 통에 싸잡아 넣어버린다.
DSM-Ⅳ의 부록에 있던 ‘월경전불쾌감장애(PMS)’는 이제 어엿한 정식 진단명이 되어 DSM-5의 본문에 자리잡았다. ADHD와 같은 라벨은 산만한 어린이들에게 가볍게 붙여진다. 이전까지 사별, 상실 등으로 인해 애도 기간에 있는 사람은 우울장애 진단에서 예외 되었으나, DSM-5에서는 이러한 예외 조항을 삭제하여 이제 애도 기간에 있는 사람도 우울장애 진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을 만한 다양한 반응과 고생들까지도 점점 병리화되어 치료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누군가 “이렇게 진단이 셀 수 없이 불어나게 되면, 정신질환을 구분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질환’을 담고 있는 통만 계속해서 커져갈 뿐, 그 통 바깥에 있는 ‘정상’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통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외침과 힘들은 더 강해질 것이다.
진단이 많아질수록 제약회사는 그 진단에 대한 약물들을 개발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즉, 제약회사 입장에서는 여러 진단들이 생길수록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실제로 DSM-5 편찬에 참여한 실무진들의 대다수는 제약회사와 재정적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DSM-5가 더 두꺼워진 것은 얼마든지 예상 가능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쉬운 진단은 자연스럽게 쉬운 처방으로 이어지게 된다. 정신과에서 진단을 받게 되면 약물 처방은 뒤따라 오는 수순이다. 반대로 정신과 의사가 특정한 약물을 처방하기 위해 특정 진단을 내리는 경우 또한 많다. 진료가 10-15분 정도이면 매우 긴 축에 속한다. 5분 이내로 끝나는 진료는 그저 당사자의 진단과 대강의 상태에 맞게 약물을 처방하는 시간일 뿐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의 사회는 모든 인간들을 인공 수정을 통해 규격화하고 통제한다. 사회는 문명인들의 말초적 욕구만 충족시켜 쉽게 통제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소마’라는 약물을 복용하게 하는데, 이 약물을 복용하면 불쾌감이 완치된다.
그 결과, 신세계 속 사람들 모두가 ‘억지’ 행복을 누리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게 된다. 어떠한 불쾌함도, 불행도 모두 질환이 되어 다 약물치료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면, 결국 우리 사회도 아주 ‘멋진 신세계’가 되어버리진 않을까?
반정신의학자였던 로널드 랭은 그의 저작 <분열된 자기>에서, 우리는 인간을 유기체로 볼 수도 있고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유기체로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과 양상을 원자계, 분자계, 세포계와 같은 유기체적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 안에서 인간은 ‘사물’의 복합체, ‘그것’의 복합체에 불과하다. 그에 따르면 현대 정신의학의 방식은 유기체적 관점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정신적인 고생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는 주체로서 그와 관계하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진단명’이나 ‘생리적 작용’과 같은 것들로 한 사람을 이해하고 치료하고자 하는 시도는, 깨진 유리병의 아주 작은 조각 하나만으로 유리병의 전체 모습을 그리는 것과도 같다. 유리병의 전체 모습을 그나마 비슷하게라도 상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파편들을 재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한 사람의 존재,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서로의 세계에 초대하고 관계맺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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