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 등에게 정당한 편의가 제공될 수 있도록 필요한 기술적·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하여야 한다"
기자는 최근 서울시내의 한 편의점을 방문해 탄산음료, 이온음료, 비타음료 등 다른 종류의 음료수 5캔을 구입했다. 눈을 감고 시각장애인들이 읽듯이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읽었다. 손가락이 조금 굵은 사람이라면 음료수 캔 점자에 손가락을 걸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또 점자로 단순히 음료라고만 표시돼있었다. 시각장애인들이 예상치 못한 음료수를 마실 수 있다는 것.
이에 대해 김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선임연구원(57)은 "정보는 정확성이 중요한데 시각장애인을 위한 정확한 정보는 음료수라는 작은 것에서부터 마련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정보 제공이라고 해놓고 음료 하나 새기면 끝인거냐"며 "시각장애인들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일부 캔음료의 점자 표시가 흐릿하게 표기돼 만져도 읽히지 않았다. 실제로 기자가 캔음료를 뒤섞어 한줄로 나열한 뒤 눈을 감고 점자를 하나씩 만져봤다. 그 결과 한국코카콜라의 사이다 '스프라이트'의 점자는 촉감으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캔음료 제조 공장의 기계 문제로 보인다. 캔음료 제조 공장에서 점자 표기를 담당하는 기계가 반복적으로 음료를 생산해 일부 노후화 된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측에선 기업을 향해 기계 점검 등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왜 고쳐지지 않았나?
캔음료에 대한 지적이 꾸준히 일고 있지만 해결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업체 측은 이 문제에 대해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캔음료에 해당 음료수가 어떤 제품인지 나열해 새길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관계자는 "캔음료 뚜껑 부분은 공간이 작다"며 "제품 이름을 표기할 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보의 다양성 측면에서 주스, 커피, 탄산 이런식으로 확대하는 건 공감한다"고 덧붙였다.
점자 표기가 일부 흐릿하게 찍힌 것에 대해선 "기계 설비를 바꾸거나 하는 건 말씀드리기 어렵다"면서 "점자 인식 수준과 일반인 기준 정보 제공이 같긴 해야 할 것 같다"고 언급했다.
한국코카콜라 측도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한국코카콜라 관계자는 "점자가 흐린 것에 대해 공장 내부의 설비를 바꾸기 어렵다"며 "다양한 종류의 음료수가 시시각각 자동화 작업으로 생산돼 하나를 바꾸려면 용기 상단 전체를 교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시각장애인의 어려움을 개선하는데 고민하긴 하지만 현 단계에서 어려움이 많다"고 덧붙였다.
문제가 불거지자 일부 음료 제조 업체에선 시각장애인들의 호소를 반영해 일부 변화를 줬다. 롯데칠성음료의 경우 지난 2017년 2월부터 탄산 캔음료에 '음료' 대신 '탄산'이라고 표기했다. 이는 칠성사이다, 밀키스 등 제품에 적용됐다. 코레일 유통은 지하철 음료수 자판기에 점자 스치커를 붙였다. 점자 스티커에는 음료명이 표기됐다.
하지만 6년 전 보도된 내용치곤 사회적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김 연구원은 "2014년 보도가 나간 뒤 기업 관계자, 공무원 등 수많은 사람이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 방문해 불편함을 공감하고 개선하겠다고 했지만 바뀐 건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시각장애인들도 돈을 내고 마시며 결정권이 있는데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캔음료 점자 해결방안 없나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일명 '장애인차별금지법'에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행위 및 국가‧지자체 의무가 명시돼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조 3항에는 '정당한 편의라 함은 장애인이 장애가 없는 사람과 동등하게 같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애인의 성별, 장애의 유형 및 정도, 특성 등을 고려한 편의시설‧설비‧도구‧서비스 등 인적‧물적 제반 수단과 조치'가 적혀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이 누리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두루뭉술하게 정해진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캔음료에 적용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에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등에서 '점자표기 의무화'를 10년째 건의하고 있지만 현실은 조용하다. 특히 지난 19· 20대 국회에서는 점자 표기 의무화를 담은 약사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포장자재 교체 등이 제조사들의 부담을 안긴다는 이유 때문이다. 장애인 인권을 둘러싼 법안은 만들어졌지만 일상생활에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와 관련해 시각장애인 여성 국회의원인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은 "점자 각인이 중요하지만 비용 문제, 들어갈 내용이 한정적이라는데 한계점이 있다"고 언급했다. 다만 "정보통신기술 발전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일상에서 QR코드나 NFC등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며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경제적 부담 없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정보를 제공 받을 수 있는 다양한 접근성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의원이 말한 NFC(Near Field Communication)는 가까운 거리에서 무선 데이터를 주고받는 통신 기술을 의미한다. 해당 기능이 있는 스마트폰을 기기에 접촉하면 자동으로 블루투스 연결이 돼 읽기‧쓰기 등이 가능해진다. 김 의원은 "반드시 QR코드나 NFC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점자 표기에 한계가 있다면 스마트폰을 활용한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논의해보는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9월 의약품과 의약외품에 대해 점자표기 의무화가 담긴 약사법 개정안은 발의한 바 있다. 캔음료 등이 점자표기 의무화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일각에선 점자 표기에 대한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 조항이 마련돼 긍정적인 변화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출처: MoneyS